윤문식 전부인 이혼 사유 및 재혼 아내 투병. 인생사 화제

 

 

'인생다큐-마이웨이'에 윤문식이 출연하여 인생사와 근황을 전해줍니다.

‘30년 외길인생!’이라고 외치며 무려 5천 회가 넘는 공연으로 ‘마당놀이계의 전설’이 된 배우 윤문식.

‘이런 싸가지’라는 유행어로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린 배우 윤문식은 '마당놀이' 전문가로 인간문화재에 준한 인물입니다.

 

1961년에 연극배우로 데뷔한 윤문식은,

봄이 오면 산에 들에, 둥둥 낙랑둥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연극에 출연했고, 놀부전, 봉이 김선달, 변강쇠전 등의 마당놀이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합니다. 우리나라의 80년대 마당놀이 중흥기를 이끈 대표적인 배우중의 한명이죠.

 

그외에 울고 넘는 박달재, 철부지들 등의 뮤지컬, 투캅스 시리즈, 귀신이 산다 등의 영화, 여명의 눈동자, 다모, 포도밭 그 사나이 등의 드라마까지 전천후로 활동한 배우입니다.

 

 

 

 

 

 

 

윤문식은 본명이고, 생년월일 1943년1월18일로 올해 나이 77세, 고향은 충남 서산에서 출생합니다.

윤문식 학력, 서산농림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졸업. 종교는 불교입니다.

윤문식 가족 사항으로 재혼 아내 신난희, 슬하 1남1녀 자녀(딸 윤을정, 아들 윤성권)를 두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윤문식은 충남 서산의 유명한 개구쟁이였다고 합니다.

동네 수박, 참외서리도 모자라 닭서리까지 하다가 어른들에게 혼이 났고, 동네에서 말썽이 생기면 윤문식부터 찾는 것이 일이었을 정도라고...

 

윤문식 - "아버지는 술과 풍류를 즐기던 한량이었다. 핏줄은 속이지 못하는 것일까, 그 모습을 닮아 내가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 광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원래 할아버지대에 서산 대천면의 땅 절반이 우리 집안 소유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재산을 탕진하고 읍내 공무원을 지내다가 결국 내가 9살 되던 해 돌아가셨다. 젊은 아내와 7형제를 덩그렁 남겨놓은 채 그렇게 떠나버린 것이다."

윤문식 - "어머니가 생선장사를 했다. 난 아침밥을 먹어본 적이 없다. 새벽장에 나가야 했던 어머니는 밥을 지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나는 아침밥을 거른다. 하루종일 속이 거북하기 때문이다."

윤문식 - "아이들은 나를 '문둥이'라고 놀렸다. 얼굴에 허옇게 부스럼이 생기고 검버섯이 피어도 어머니는 나를 보살펴주지 못했다. 제대로 씻지도 않고 먹지도 못했으니 꼬락서니가 엉망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시장 바닥을 휘젓고 다니던 꼬마 장돌뱅이였다."

 

그러다가 윤문식은 동네를 돌아다니던 악극단을 보고 혼을 빼앗길 정도로 충격을 받습니다.

윤문식 - "간혹 천막앞에 쭈그리고 앉아 나혼자 대사를 외웠다. 내가 견우도 맡고 직녀 연기도 했다. 1인극을 한 것이다. 그러다가 농고 1학년 학예회때 처음 연극 무대에 섰다. 내 오랜 연기 경력의 시발점이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윤문식은 돈을 벌기 위하여 무작정 가출을 하기도 합니다.

윤문식 - "막상 집을 나오기는 했지만 갈데가 없었다. 결국 동두천으로 갔다. 매형(둘째 누나 남편)이 다니는 미군부대에 가면 먹고 잘 수는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미군 심부름을 하는 하우스 보이, 이발소 면도사 등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다. 새우잠을 자면서도 배우가 되겠다는 소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윤문식은 1964년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하게 됩니다.

윤문식 - "꿈에 그리던 대학 강의실에 들어서는 순간 아찔했다. 칼날같이 주름을 세운 양복바지에 번쩍번쩍 윤이나는 백구두를 신은 신사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멋쟁이란 멋쟁이는 모두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다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윤문식 - "식은땀을 흘리며 맨 뒷자리로 가려는데, 나와 처지가 비슷해 보이는 반가운 얼굴이 눈에 띄었다. 지금도 연극무대를 지키고 있는 최주봉과 박인환이다. 박인환은 그나마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나와서인지 허름한 양복으로 신입생의 구색을 갖추고 있었지만, 최주봉과 나는 곰팡내 팍팍 풍기는 말 그대로 시골촌닭이었다. 밑단이 너덜너덜하게 해진 군복 바지에 검정운동화를 끌고 올라온 가난한 유학생이었다. 따돌림을 당한건지, 우리끼리 어울려 다닌건지 잘은 몰라도 우리는 못난이 3형제로 불렸다."

 

이때부터 윤문식, 최주봉, 박인환의 오랜 인연이 시작됩니다. 윤문식과 함께 마당극을 이끌었던 연극배우 김성녀는 후에 만나게 되죠.
윤문식 - "무대는 따로 없었다. 제방이나 학교 운동장이 무대였다. 낡은 조명기구를 둘러메고 북과 꽹과리를 치면 한꺼번에 500여명의 관객들이 몰려들었다."

윤문식은 외모때문에 처음부터 '곱상한 역할'이나 주인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윤문식의 30대는 배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연극을 계속 하면서 '한국의 정서'를 찾기 위하여 노력했죠.

결국 윤문식은 판소리, 민요, 고전무용과 탈춤을 배우면서 한국적인 정서를 함양했고, 이것은 나중에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런 생활을 하던 윤문식에게 어느날, 소개팅 제안이 들어오게 되는데요.

 

 

 

 

 

 

윤문식 전부인 이영순

 

윤문식 - "76년 극단 '민예'시절, 갑자기 연극계 선배인 이승규가 느닷없이 사람을 소개해 주겠다며 나를 찾아왔다. "내 여동생 친구라는데 공연 팜플렛을 보고 너를 찍었단다. 한번 만나보지 않을래?" 난 결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떠돌이 연극쟁이를 이해해줄 여자도 흔치 않으려니와 행복한 가정이란 단어가 내게 어울리지 않은 것 같았다. 맘 편히 술이나 한잔 걸치자는 생각에 선뜻 자주가던 허름한 선술집으로 약속 장소를 정했다."

 

이때 윤문식은 첫번째 부인이었던 이영순을 만나게 됩니다. [※ 당시 윤문식 나이는 36살, 전부인 이영순 나이는 33살로 3살 연하네요]

 

어쨌든 당시 지독하게 가난하고 못먹었던 연극배우 윤문식에게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평소 단골집이었던 선술집으로 약속 장소를 정한 것이죠.

윤문식 - "그녀가 빨간 외투를 걸치고 나왔다. 예쁘지도 않았고 썩 못생긴 것도 아니었다. "아줌니, 여기 막걸리하구... 안주는 필요없고 그냥 양배추쌈이나 좀 주쇼." 인사를 하는둥 마는둥하며 주문부터 했다. 사람보다는 술 욕심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이영순 - "잠깐만요. 제가 살테니 드시고 싶은 안주를 고르세요."

윤문식 - "결국 돼지 족발을 큰 접시로 시켰다. 씻지도 않은 더러운 손으로 족발을 뜯으며 간만에 아주 맛있게 술을 들이켰다.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윤문식 - "술을 마시면서 난 내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 노총각의 생활, 풍류를 즐겼지만 집안 재산을 다 날린 아버지, 생선 장수였던 어머니 등...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어느새 자정이 가까워졌다. 그녀가 그만 집에 가겠노라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을 때에야 비로서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반려자를 소개받는 자리인지, 코가 비뚫어지도록 술을 마시는 자리인지 분간이 안 갔던 것이다."

윤문식 - "나는 "그럼 조심해서 살펴 가셔유." 더벅머리를 긁적이며 엉거주춤하고 서 있는데, 한 선배가 내 호주머니에 50원을 푹 찔러넣었다. 택시로 집앞까지 바래다 주라는 것이다. 엉겹결에 그녀를 따라 대폿집 문을 나섰다."

이렇게해서 윤문식과 이영순의 인연은 잘 이어집니다.

 

 

 

 

 

 

윤문식 - "다음날 다시 그녀를 만났다. 그제서야 그녀가 초등학교 교사이고, 장인 어른 될 사람이 교장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날 이후 우리는 90일 동안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얼굴을 마주했다. 보면 볼수록 참한 여자였다. 그녀 앞에만 서면 정말 광대가 된 것 같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세상에 대고 심하게 욕설을 퍼붓다가 그녀가 자지러지게 웃을만큼 재롱을 떨기도 했다. 알 수 없는 야릇한 감정이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윤문식 아내 이영순 집안 직업 - 교사]

윤문식 - "난 언제나 빈털털이였다. 술값이며 담뱃값을 그녀 혼자서 모두 계산했다. 공짜로 술을 마시는 것은 신났지만, 내 속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 기뻤다. 행복하다는 말을 실감했다."

윤문식 -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두 눈이 퉁퉁 부어 무대 앞에 나타났다. 집안의 반대가 보통 심한 것이 아니었다. 광대에게 시집을 가려면 차라리 목숨을 끊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내 자신이 초라하고 부끄러웠다."

 

윤문식 - "결국 장인 어른의 승낙이 떨어지기도 전에 도봉산장을 빌려 결혼식을 치뤘다. 아내는 우리가 살 집을 미리 마련해 놓았다. 서른살이 넘도록 교직 생활을 하며 알뜰살뜰 저축해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윤문식은 1977년 이영순과 결혼식을 올립니다. 당시 교장 선생이었던 장인 어른의 허가는 끝내 없었고, 둘이 그냥 강행한 것이죠. (나중에 결국 딸과 사위를 용서하게 됨)

 

윤문식 - "결혼한지 3년 정도가 지났다. 처음에는 여우같이 사랑스럽던 아내가 살쾡이로 변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못 살겠어요. 당신 용돈은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아내가 더 이상 담뱃값을 쥐어주지 못하겠다는 항전의 나팔소리였다."

 

집을 마련하고 생활비까지 버는 이영순이 드디어 폭발한 것 같네요.

 

윤문식 -"40살 되던 해 난생 처음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80년 국립극단에서 받은 첫월급을 고스란히 아내에게 바쳤다. 26만 4천원이었다. "어머 당신이 어쩐 일이에요. 정말 고마워요." 아내가 어린아이처럼 내 볼에다 뽀뽀를 하며 애교를 떨었다. 그제서야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윤문식 - "아내는 무척 알뜰했다. 허튼 일에는 10원도 쓰지 않는 소문난 구두쇠였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부산공연을 했을 때다. 중학생 2명이 꽃을 사들고 분장실로 나를 찾아왔다. 장학금을 줘서 정말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내게는 짠지보다 더 짜게 굴었던 아내가 몰래 행한 일이었다. 아내가 정말 사랑스러웠다."

 

이렇게 안정된 생활을 기반으로 윤문식은 80년대 한국 마당놀이의 중흥기를 이끕니다. 당시 정월 초하루면 TV에서는 어김없이 마당놀이 시리즈가 펼쳐졌습니다. 이춘풍전, 춘향전, 배비장전 등. 특히 윤문식의 인기가 워낙 좋다보니 방자전이라는 공연물이 따로 올라갔을 정도였죠.

 

윤문식과 전부인 이영순 부부 사이에는 아들과 딸 한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90년대 초반 이영순이 당뇨를 앓기 시작하고, 거의 15년을 앓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2007년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윤문식 - "아내 병이 악화되면서 온몸에서 농이 나오니까 하루에 기저귀 4백 장을 썼어요. 간병인도 버티지 못하고 나가는 상황이니 제가 돌볼 수밖에 없었죠."

결국 윤문식과 윤문식 딸이 번갈아 이영순의 병간호를 하게 됩니다.

 

 

 

 

 

 

 

윤문식 -"15년 동안 이별 연습을 한 거요. 그런데 그게 충분하지 않았나 봐요. 지방 공연을 하느라 임종을 지키지 못했는데, 막상 저세상으로 떠났다는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더군요. 연기나 삶이나, 완벽함은 없는 거죠. 그러니 그렇게 뭔가에 달려드는 것 아니겠어요."

윤문식 아내 이영순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윤문식은 2007년에 당뇨로 15년 투병 후 세상을 떠나게된 아내를 언급하면서 아내와 산 세월이 30년인데 그 중 15년이 병간호를 했다고 합니다.

 

아내의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간호를 해주지만 아내의 정신은 멀쩡하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며 외면하는 모습이 지금도 가끔은 꿈에 나온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더 자상하게 해줄걸하는 후회가 따라옵니다.

 

윤문식 - "사위(이름 김종영)가 결혼을 일 년 미루겠다고 했는데, 내가 그 사람도 바랄 거라는 말로 강행했어요. 이미 아내가 결혼 날짜를 알고 있었어요. 사위 될 사람이 병원에 왔는데, 아내가 들어오지 말고 병실 문을 반만 열어 놓고 얘기하자고 해요. 아픈 장모의 모습을 사위에게 보여 주고 싶었겠어요? 그래도 사위가 들어오겠다니 병실 불을 끄고 만났어요. 곁에 온 사위 손을 잡고는 미안하다는 말만 계속 하고…."

윤문식 - "처음에는 하나뿐인 딸을 빼앗아간다는 생각에 도둑놈 같고 싫더니 이제는 사위라기보다 내 아들이에요. 장모의 병간호를 위해 병원 근처에 신접살림을 마련하겠다고 하더군요. 아들이나 다름없죠."

 

 

15년동안 아내를 병간호하다가 떠나보낸 윤문식이 딸과 사위에게 충고를 합니다.

 

윤문식 - "내가 셈을 해보니 아내와 14만 날 정도 살았는데, 그중에서 오롯이 둘만의 시간을 보낸 게 1000일이 안 돼요. 무대에 나가랴, 자식 챙기랴, 돈 걱정하랴, 부부간의 시간은 없습디다. 이게 얼마나 끔찍한 얘기냔 말예요. 우리는 그렇게 바보처럼 살아가고 있어요."

윤문식 - "(딸에게) 아빠 생각 너무 많이 하지 마라. 효도할 생각하지 마라. 대신 10일에 하루는 부부 둘만의 시간을 보내라."

 

윤문식 재혼 아내 신난희

 

그렇게 2007년 전부인 이영순과 사별한 윤문식이 2011년 같은 아파트에 고 있던 신난희와 재혼을 하게 되는데요.

상대는 바로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던 신난희.

신난희 나이가 윤문식보다 18살 연하이고, 전직 국가대표 유도 선수의 딸입니다 [신난희 집안]

 

 

현재 아내를 처음만나게 됬을 때는 나이차이가 18살보다 더 나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만나게 된 계기는 같은 아파트이웃으로 가끔 마주치게 됬는데 항상 윤문식을 보며 웃으며 인사를 했고 알고보니 둘다 혼자사는 상태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때 결혼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느날 윤문식은 촬영스케줄이 있어 지방에 내려갈 일이 생겼지만 차가 없었습니다.

신난희는 직접 운전을 하여 데려다 준다고 하였고 함께 지방에 내려가는 길에 아내가 먼저 같이 살자고 말했습니다.

윤문식은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아내와 결혼한다면 매맞을 일이라며 거절했지만 아내는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며 50세인 것을 인증하게 되었습니다.

신난희 - "윤문식과 아파트 주민이었는데 전처와 사별 후 힘들어 하더라. 그래서 내가 ‘밥 좀 사달라’고 했는데 드라마 촬영 얘기하다 내가 지방까지 운전 해드리겠다고 하면서 매니저 역할을 했다."

 

윤문식 - "술을 먹고 비틀거리던 나를 챙겨줬던 예쁜 여인이 지금의 아내다. 아내가 먼저 나에게 같이 사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내가 프러포즈하려 했지만 아내가 먼저 눈치를 챘다."

 

 

 

 

 

 

 

윤문식 - "정말 감동 받았다. 남한산성 근처에서 밥을 먹고 공동묘지 쪽으로 가게 됐는데 거기서 나도 모르게 아내에게 뽀뽀했다. 죽은 사람들이라 소문 안 날 거 같아서 공동묘지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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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난희 - "남편의 존재가 내겐 태산같다. 18살 연상임에도 결혼을 결심한 이유는 그의 머리를 열어보고 싶을 정도의 박학다식함에 반했기 때문이다."

아내를 하늘이 주신 선물로 여기고 모시며 살고있다는 윤문식은 천사가 지금의 아내로 온 것 같다며 애정을 드러냈습니다. 외롭고 힘들었던 길을 함께 걸을 수 있고 황혼의 사랑도 젊은 사람들처럼 뜨겁다며 사랑예찬론을 알렸습니다.

 

윤문식은 전부인과의 사이에 1남1녀의 자녀가 있고, 신난희 또한 두 딸이 있습니다.

 

결국 윤문식과 신난희는 먼저 동거부터 합니다.

신난희 - "동거부터 시작했다. 당시 윤문식이 공연하는 장소랑 내가 살던 집이랑 굉장히 가까웠다. 2회 공연을 할 경우 굉장히 늦게 끝나지 않나. 윤문식은 운전도 안 해서 지하철 타고 다녀야 하는데 너무 늦으면 출퇴근이 번거롭기 때문에 한 두 번 우리 집에서 자고 공연장에 갔다. 그것이 계속돼서 결국 눌러앉았다."

 

신난희 - "하지만 동거를 하니 안 좋은 점이 있었다. 윤문식의 아들이 직장 때문에 다른 곳에서 자취를 하는데 아버지가 우리집에 와 있으니까 주말에 집에를 못 오더라. 아들이 불편하지 않을까 싶어서 방 세칸짜리로 옮기자고 말했다. 그렇게 아들 방 하나를 만들어놨더니 주말마다 오더라."

두사람은 2011년 결혼식을 올리는데, 윤문식의 두번째 결혼 역시 쉽지는 않습니다.

 

 

윤문식 - "아내와 재혼하기 전에 장인 어른이 유도 국가대표 선수 출신이라 '결혼 전에 죽는거 아닌가' 그랬다. 처음 만나기 전 굉장히 떨었다."

참고로 윤문식의 장인은 윤문식보다 12살, 장모는 4살 연상입니다. 

윤문식 - "장모님은 30년 간 마당극을 본 팬이라 그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장인 어른은 무서웠다. 반대를 굉장히 많이 했는데 결혼 할 때 장모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결국 장인 어른이 '앞으로 자네를 윤서방이라고 부르겠네' 하시더라. 그렇게 허락을 받았다."

윤문식: "결혼한 후에는 장모님이 나보다 더 불편해 하신다. 전화 통화할 때는 윤서방이라고 부르시는데 직접 마주하면 나를 윤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신난희 - "남편이 과거에 돌아가신 형님(윤문식 전부인에 대한 신난희의 지칭)에 대한 애틋함을 담고 계신다. 물론 간직하고 있는 것은 좋지만 나랑 사니까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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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난희의 말처럼, 윤문식은 여전히 전부인를 잊지 못합니다.

윤문식으로서는 잊을 수 없고, 또 그렇다고 신난희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닙니다.자칫 불화의 원인이 될 수 있죠.

하지만 여기서 윤문식은 자신의 지혜를 발휘합니다.

 

윤문식 - "전처가 살아있을 때 '더 좋은 말을 할 걸, 짜증 덜 낼 걸' 그런 여한이 많다. 지금 아내에게는 미안하지만 아직도 가끔 생각난다. 전처 기일이 재혼한 아내 생일이다. 그래서 전처의 환생이 지금의 아내라는 생각에 더 잘 해주고 있다."

 

윤문식의 말은 전처를 완전히 잊지 않으면서, 그것을 빌미로 현재의 아내에게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말이라면, 신난희 역시 수긍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윤문식 폐암

 

윤문식은 평소에 담배를 많이 피긴 하지만 어느날부터 날만 추워지면 기침이 늘게되었고, 그를 본 아내가 이상함을 느끼고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아보게 되었답니다.

병원에서 윤문식은 폐쇄성폐질환을 진단받게되었는데, 그 후에 병원을 찾았더니 폐암3기 판정이 나왔습니다.

가장 많이 죽는 폐암으로 어떻게 갑자기 그럴수가 있냐며 항암치료를 거부했습니다.


이에 아내 신난희는 다른병원에 한번 더 가보자 하였고 다행히 폐암초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윤문식은 폐암 수술을 하고 완쾌가 되었고 병원을 자주가서 건강검진을 하는 것이 좋다고 느끼고나서 이제는 3개월마다 정기검진을 가기로 했다고 합니다.

 

 

 

 

 

 

황혼재혼을 추천하지만 호칭이나 재산문제가 따라올수도 있다고 합니다. 윤문식은 그것에 대해서는 부모중 한 명이 세상을 떠나게되면 자식들에게 미리 재산을 분배해주면 된다고 제안했습니다.

 

윤문식 - "나는 (윤난희와) 혼인신고 전 아들과 딸을 불러서 내 재산을 보여주며 내 재산이 이 정도니 우리 3등분 하자고 했다. 아이들도 쾌히 승낙했다. 그래서 부부 노후자금엔 손을 안 대기로 하고, 나도 자녀의 돈에 손을 안 대기로 했다."

 

윤문식 또한 호칭에 갈등을 겪었다고 합니다. 재혼한 아내에게 딸이 엄마라는 말이 안나온다고 했지만 손녀는 엄마는 왜 할머니에게 아줌마라고 하냐는 질문을 듣고는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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